정의로운 악인영웅 by 김윤정

게임회사에서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순수한 열정과 높은 이상으로' 일하는 열혈맨들이 가끔 있습니다.
뭐, 좋은 일이지요. 거기에 반대되는 사람은 아마도 '늘 현실과 타협하여, 남들에 묻어가는 열정없는 잉여인간들' 이 될테니까요. 
반대할 이유도 없는 거지요. 아무도 잉여인간이 되고싶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최고로 높은 이상적인 결과물을 위해, 낭비없는 조직체제와 실수없는 작업물들이야말로 이상의 극치니까요.

이런 사람들은 주로 그래픽디자이너에 많습니다. 
가끔 프로그래머들에게도 보이곤 합니다만 그래픽 디자이너에 비해 좀 적습니다.
기획에서 저러는 사람은 알아서 왕따되기 딱 좋아서 자기가 스스로 자폭해 버리는 케이스가 많고...
그래서 특히 협업이 상대적으로 적고 작업에서의 개인주의가 심할 수 밖에 없는 그래픽디자이너 중에 가끔 저런 친구들이 보이곤 합니다.

높은 이상주의라, 사실 좋은 겁니다. 미래를 바라보고, 크리에이터로서의 고뇌와 열정, 기업의 부품이 되지 않도록 언제나 촉각을 곤두세우며, 적당주의와 타협을 용서하지 못한다라... 정의로운 사람이지요. 마치 이런 사람만 가득한 집단이 있다면 최고의 조직이 될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그래픽을 제대로 배운 사람들은 언제나 저래야 한다고 얘기를 들어 왔습니다.
대화를 하라고는 모든 책에 씌여 있지만 적당한 타협은 크리에이터의 목숨을 앗아가는 최고의 독이라는 말을 성경처럼 지키고 있는 거지요.

유추하건데 이들의 시작은 열정높은 신입이었을 겁니다. 혹은 다른 직종에서 혹독한 경험을 쌓고 이직한 중견신입일 수도 있지요.
처음에 들어와서 일을 하다가 어느 정도 프로젝트 한두개를 끝마치고 익숙해질 무렵에는 자신의 가치관에 대한 선택의 위치에 높이 됩니다.

첫 번째 선택은 주변인으로 남는 것입니다. 자신이 리더가 되고 싶지도 않고, 리더가 됨으로써 생기게 되는 책임과 각종 새로운 도전 환경이 싫어 그대로 '유지' 를 원하는 케이스입니다. 실력이 높은 사람이 이런 '유지'를 택하게 된다면 '친절하고 실력도 좋지만 야망없는 사람좋은 형님' 으로 남게 되거나 '자기 실력은 오직 자기만의 것' 이라는 조개껍데기 형태가 되기도 합니다. 실력이 그다지 좋지 못하다는 것을 자기가 느끼게 된 사람은 계속 불안해하면서도 그저 유지하기를 원하는 케이스가 되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는 꼭 팀원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며, 팀장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이러한 주변인은 사실 중요한 인재입니다.  마치 듣기에는 이런 사람은 쓸모없는 밥벌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이들이야말로 묵묵하게 프로젝트를 유지시켜주는 몸통입니다. 이들은 장군이 아니라 보병이며, 이들이 없으면 적진에 깃발을 꽂을 사람이 없게 됩니다. (사실 모두가 장군으로 이루어진 조직만큼 쓸모없는 조직도 없습니다) 이런 인재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안정된 '유지' 를 약속해야 하며, 지속적이지만 무리하지 않을 정도의 '자극' 과 '기회' 을 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 선택은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실력이나 업적을 인정받고, 거기에 남보다 뛰어난 열정을 인정받아 '자극제' 로써의 역할을 위임받는 '리더' 말이지요. 이들은 프로젝트를 해 보면서, 이 회사에는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실력에 대한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자신은 이 회사의 구세주가 될 수 있으며, 영웅이 될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들도 정말 중요한 인재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중요한 인재라는건 굳이 따로 챙겨주지 않아도 회사에서 모두 알고 있습니다.
이들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중요하며, 회사에서도 많은 기대와 보상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인정받은 주인공 중, 높은 이상주의로 강하게 뭉친 정의로운 영웅이 간혹 태어나게 됩니다.
이들은 자신의 실력이 높음을 알고 있으며, 자신의 발언권이 최고는 아니더라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란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디서부터 잘못되냐면 - 자신을 선민의식으로 포장하기 시작할 때부터입니다 -

분명히 그들의 눈에는 주변인으로 남은 사람들을 이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열정도 없는 것 같고, 남이 깔아놓은 길만 가기를 바라는, 말그대로 '시체' 나 '좀비' 와도 같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이영웅은, 의도하지 않은 악인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일단 그는 첫 번째도 그런 주변인들과 대화하려 시도합니다. 이상적인 길이 있으니 거기로 모두 같이 가자라는, 아무리 생각해도 맞을 수 밖에 없는 길을 제시하면서 말이지요. 이 단계의 문제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다는 전제는 깔아놓고 간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수 밖에요. 타협이란 실력없는자들의 변명일뿐이라고 생각하는 친구들이니까요. 물론 이런 대화는 대화가 되지 않고, 일방적인 '설교' 가 될 가능성이 커질 뿐입니다. 결과는? 자신의 생각에 동조하거나 자신에게 감복한 이들로 이루어진 '뒷조직' 이 이루어지게 되는거지요. 훌륭한 조직내의 악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짝짝짝. 진정한 조직의 악은 실력이 없거나 성격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을 절단해 버리는 존재입니다.

물론 이 조직이 건전하다면 문제가 없지만, (물론 조직같은건 만들지도 못하는 설득기술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일하는 실력과 설득실력은 다르니까요) 거의 대부분 이런 조직(혹은 개인)은 철저히 배타적입니다. 자신이나 자신과 동조하는 몇몇을 빼놓고는 '구제불능' 이라던가 '실력도 없으면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잉여인간' 으로 치부해 버린다는 거지요.
이론상으로는 더더욱 철저해 보입니다. '이대로 있어선 안돼!' '우리는 최고의 실력과 이상을 향해 가야 해!' 라는 말에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테니까요.

그렇지만 이런 집단이 올바르지 않은 길을 택한 것이라는 이유는, 이들의 행동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들이 정말로 실력이 좋고 이 회사를 바꾸고자 하는 열의가 있다면 무엇을 선택해야 했을까요? 이들은 분명 자존심에 상처를 입더라도 자신들이 생각하는 주변인들에게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는 것 부터 해야 하는 것입니다. 흙탕물에 들어가지 않고, 흙탕물 밖에서 깨끗한 옷을 입은채 흙탕물에 들어간 사람들을 설교하고 계몽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국회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우선 국회위원이 되어야 합니다. (아니면 쿠테타라...), 말쑥하고 깨끗한 , 흙 하나 튀지 않은 반짝반짝한 새 작업복을 입고 행여나 물튀길까 조심조심 다니면서 자신은 농민을 생각하고 농민을 살기좋게 이끌겠다는 얼빠진 정치인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의로운 악인' 입니다. 사실상 현재의 몇몇 정치인분들과 별로 다를바가 없지요.

근본적으로, '자신은 저들과 달라' 라는 마음가짐을 가진 상태에서 무슨 행동을 하더라도 그 행동은 진실된 반응을 이끌어내기 힘들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신과 동조하지 않은 이들을 '악인' 으로 치부하기 시작하는 것이 그 다음 행동이지요. 자신의 행동이 제대로 먹혀들어가지 않게 됨에 따라, 자신의 껍질을 더더욱 단단히 닫고 방관자가 되어 버리던가 , 이 회사는 원래 썩어서 어쩔 수 없는 곳이야 라고 세상을 왕따시켜버리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면 한계까지 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이론적으로는 완벽하다는게 문제입니다. 아니 너무 완벽해서 문제이지요. 정의감에 너무 강하게 도취된 경찰이 결국 사건을 일으킨다는 만화와 같이, 너무나도 정의감이 강렬한 사람은 오히려 커다란 문제점을 낳게 됩니다. 바로 '커뮤니케이션의 단절' 이라는 큰 사건을 말이지요.

무엇보다 이런 정의로운 악인영웅이 무서운 것은, 대화를 통해서 해결하거나, 아예 면접때부터 걸러내기가 상당히 까다롭다는 것입니다. "저는 언제나 타협을 전제로 하지 않고, 끊임없는 열정과 이상을 향해 몸을 바쳐 달려가고 있습니다" 는 가장 교과서적인 면접 대답중 하나니까요.

만약 자신이 능력이 있고, 이 회사나 이 조직을 뭔가 계몽시키고 싶다면, 먼저 자신이 남보다 잘났다는 그 생각부터 버려야 합니다.
세상 사람은 많은 가치관이 있습니다. 실력을 최고로 치는 사람이 있으며, 조직의 융화를 최고로 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안정을 최고의 덕목으로 치는 사람이 있으며, 효율을 최고로 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가치는 모두 중요한 가치라는걸 인정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쓰레기라는 생각을 가지면 끝장입니다. 세상에 필요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의 가치관과 능력을 꺼내놓지 못할 뿐입니다. 그런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조직을 정말로 발전시키고 싶은 영웅이 있다면, 자신의 생각을 전파시키기 보다 자신의 행동으로 먼저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너무 급진적이어도 곤란하지요. 급진적인 변화를 참지 못하는 사람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물론 위급한 상태라면 좀 다르겠지만) 자신의 정의감은 조금 누른채, 차츰차츰 진행하는 기술을 익히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 사내 세미나 같은 것도 좋겠지요. 우선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남김없이 알려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어차피 그런 세미나로 자신의 실력을 도둑맞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_- 자신이 손해라고요? 그런 생각을 가지고서 어떻게 조직을 발전시키겠다는 것입니까? 누군가의 희생 (이 경우의 희생은 매우 소소한 편입니다) 없이는 조직의 발전을 기대하기 힘듭니다. 물론 그 조직은 그 희생을 '알아주어야' 한다는 전제가 따르긴 하지만요.

하지만 이건 정말 말만 쉽지... 사실상 '정의로운 악인영웅' 이 된 사람은 대부분 조직의 와해에 앞장서게 되거나 자신이 그만두게 되는 케이스가 많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말보다 행동' 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것도 이상주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뭐 갑자기 생각나서 구구절절히 써보긴 했습니다만, 결론은

"일단 저나 잘해야죠"
ㅋㅋㅋ


덧글

  • Elin 2010/03/01 22:48 #

    아.. 글 잘 읽었습니다. ^^ 새로운걸 또 알았네용.. 회사생활 해보면 피부로 느끼게 될 내용들이겠죠?ㅋ
  • 김윤정 2010/03/01 23:02 #

    넹 뭐 회사에는 별별 일들이 가득...
  • storm 2010/03/01 22:58 #

    후후 그래서 회사 사람끼리 담배 피며 하는 농담(반 진담반) 중에 하나가

    "연봉 많이 받는 평사원이 최고야" 죠...
  • 김윤정 2010/03/01 23:02 #

    문제는 그런 평사원도 언젠가는 연봉에 걸맞는 책임을 강요당한다는 것이겠지요 ^^
  • storm 2010/03/01 23:26 #

    뭐 그래도 평사원은 주어진 일만 잘 해도 먹고 살 수 있으니까 골치가 덜 아프죠^^;
    팀장쯤 되면 팀이 해야할 일도 만들어야 하고 그걸 또 팀원들에게 나눠줘야 하고, 잘 하는지 체크해야 하고, 유관부서와 협업도 해야 하고... 정작 내 일 할 시간이 없다능 ㅜ.ㅜ
  • 김윤정 2010/03/01 23:27 #

    평생 평사원만 할 수 있다면야 T_T
  • TKstyle-태근 2010/03/01 23:33 #

    참으로 동감되는 글입니다. 보고 그냥 지나갈 수 가 없네요. ^^;
    저도 이번에 회사에서 여러가지 문제로 겪은바가 있어서 글을 읽으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되네요.
    문득 예전에 들었던 "게임 만드는것은 어렵지 않지만 사람이 어렵다" 라는 말이 문득 떠오르네요.
  • 김윤정 2010/03/02 10:48 #

    결론은 사람인 것인가봐요
  • 디카스테스 2010/03/01 23:39 #

    아 이런 ㅋ 결론이 너무 와닿네요 ㅋㅋㅋ

    세상에 사는 민중들은 다크히어로를 원하지만 이 세상은 다크히어로로 살기엔 너무 힘들어요.
  • 김윤정 2010/03/02 10:48 #

    혼자 일하는게 아니니까요 :)
  • 앤써니 2010/03/01 23:48 #

    저는 그다지 혼자서 튀거나 할 성격이 못되서 대개 주변인으로 남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전 악인이나 영웅이나 못되는듯ㅇㅅㅇ
  • 김윤정 2010/03/02 10:49 #

    그치만 문제점이 보이고 고칠점도 뻔히 보이는데 가만히 있는것도 죄의식이 생길 수밖에 없더군요
  • 앤써니 2010/03/02 15:26 #

    전 몇번 긁어 부스럼을 했던 적도...ㅠㅠ
  • 김윤정 2010/03/02 20:44 #

    저런 ㅋ
  • 박PD 2010/03/02 00:00 #

    Agile 도입에서 가장 문제되는 경우가 지금 말씀하신 내용이랑 비슷하네요. 조만간에 저도 정리해서 올려보겠습니다. :)
  • 김윤정 2010/03/02 10:49 #

    역시! 기대하겠습니다 :)
  • 정현예 2010/03/02 02:23 #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공감가는 내용이 많네요..^^
  • 김윤정 2010/03/02 10:49 #

    감사합니다. 자주 놀러와 주세요 :)
  • haemin 2010/03/02 10:50 #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글입니다..먼저 자신이 남보다 잘났다는 생각을 버려야된다는 말에 백만번 공감하게 되네요^-^
  • 김윤정 2010/03/02 20:45 #

    뭐 일단 저부터 좀 겸손을... ㅎㅎ
  • 케인 2010/03/02 12:08 #

    저는 어떤 부분에 속해있는지 생각하게 되네요...
  • 김윤정 2010/03/02 20:45 #

    전 실제로 악인이었던 적이 있어서 (...)
  • 마이즈 2010/03/06 20:32 #

    두번째가 되고 싶지만, 아직까지는 실력이 부족해 향후 몇년간은 계속 첫번째로 머물러야 할 것 같아요.
    스스로 당당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기고 나면 그때쯤 이 글을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
    분명, 지금 느끼는 '정의로운악인영웅'과 그 입장에서 보는 '정의로운악인영웅'은 다를테니까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_^
  • 김윤정 2010/03/06 21:26 #

    분명 시간이 지나시면 중심인물이 되실 겁니다 :)
  • 프리가 2010/06/17 12:46 #

    잘보고 갑니다.
    뭔가 덧글을 달고 싶은데,
    제가 글재주가 떨어지는지라 제대로 표현할 자신이 없네요:D
    좋은 글 감사합니다.
  • 김윤정 2010/06/17 13:28 #

    감사합니다 :D
  • 키니에 2011/06/22 16:18 #

    오래 된 글이라 댓글을 보실지는 모르겠지만 ㅎㅎ
    정말 어렵고도 중요한 일인것 같아요...
    선민의식부터 버리고 일단 같이 가는게 중요하겠군요 ㅎㅎ
  • 김윤정 2011/06/22 18:06 #

    오래 된 글도 계속 봅니다 잇힝. 조금 잘났다고 기고만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늘 겸손하도록 노력해야겠지요
  • 홍일도 2011/06/23 23:48 #

    음... 고맙습니다.
  • 김윤정 2011/06/24 09:02 #

    고맙기는요. 한번 뵙고 놀아야죠? ㅋ
  • 홍일도 2011/06/27 13:31 #

    넵~ 조만간 뵙고 삼겹살에 쐬주라도 한잔 대접하고 싶네요 ^^a
  • 김윤정 2011/06/27 13:49 #

    엄허 삼겹살 비싸요 ㅋ 시간날때 근처 오세요. 제가 저녁 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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